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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그 죽은 동물들이 어떻다는 이야기인가.

 

                                                                                                                                                               

                                                                                                                                                                    채영

  

 

죽은 자는 말이 없다. 그러나 죽음 후에도 갈등은 계속되곤 한다. 동물도 마찬가지다. 여전히 인간 중심적 사고에서 바라보는 동물들의 죽음은 생명의 소중함과 자연과의 공존을 외치는 오늘날에도 역시나 쉽게 이루어진다. 미디어는 자극적이고 갈등을 만든다.  동물 때문에 목숨을 잃은 인간의 이야기는 꺼진 생명에 대한 추모보다는 골치가 된 생명들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로, 개발에 의해 터전을 잃은 동물들의 이야기는 비용과 효율의 문제로 순식간에 전환된다. 여전히 생명들 간에는 확고한 위계가 존재한다. 인간의 삶을 위해 자연과 동물을 죽음으로 내몰고 있다.

 

〈그 vs 그것〉 전시는 이 중 한 죽음에 대한 이야기에서 시작된다.  흔히 로드킬 road kill 이라고 불리는 인간사회가 도로에 내몬 비극적인 동물들의 죽음이다. 작가는 개인적 경험과 그로부터 촉발된 감각들을 작업으로 제시한다. 작가는 이번 전시에서 한동안 방치되었던 전시공간의 시공간적 감각들 위에 시각적이고 촉각적인 그리고 청각적인 감각의 언어들로 작업을 진행한다.1)

 

전시는 전시장 내부와 외부 그리고 이를 연결하는 복도로 나뉜다. 공간 특성상 구분되어 있지만 전시는 하나의 작업처럼 각 작업들이 얽힌 채 서로를 간섭한다.  공간에 들어서자마자 들리는 사운드 작업이 모든 작업들을 연결한다. 신화적 텍스트의 나열과 내외부의 설치 작품들 사이에서 이 소리들은 다소 제의적인 전시 분위기를 고조시키기도 하지만 동시에 관객을 현실의 감각으로 돌아오게 만든다.  전시장에 울려 퍼지는 다소 불쾌한 사운드는 마치 동물의 울음소리처럼 들린다. 이는 공사 현장인지 산업 시설인지 알 수 없는 기계의 파열음으로 추정되는 소리다. 사운드는 우리 삶 가까이에서 떠도는 동물들과 그들의 죽음을 마치 유령처럼 연상하게 한다. 작가의 작업실 주변에서 반복적으로 들리는 이 소리들이 작가가 마주쳤던 동물의 사체에 대한 잔상처럼 맴돌아 전시공간에서 울린다.

 

전시 공간은 방치된 시간들이 축적된 흔적들을 그대로 드러낸다. 이 속에서 사운드 작업은 전시를 더 어두운 감각들로 만든다. 다소 음산한 가운데 전등으로 복도와 전시 공간 내부 벽 맨 위를 비추면 구약성서와 유태인 경전의 내용들이 붙어 있다. 텍스트는 욥기의 구절에 등장하는 ‘베헤모스’와 ‘레비아탄’의 묘사와 그 죽음에 관한 내용들을 전한다. 두 동물은 이번 전시 제목의 ‘그’에 속한다. 성경에서 ‘그것’으로 불리는 다른 동물들과 달리 이들은 신에게 이름을 부여 받은 존재들이다. 인간세계를 위협하고 경고하는 존재였던 이 괴수들은 결국 도축되어 동물의 머리를 한 의인들이 초대된 만찬의 식탁에 올라간다.2)  이들의 최후는 관객이 공간 외부로 나갈 때까지 텍스트로 ‘그것’들의 죽음 위에 떠 있다.  작가는 로드킬로 내몰린 그것들의 죽음을 “카운트 되지 못한 죽음들”이라고 부른다.  전시장 내부에서 ‘그것’들의 죽음이 ‘그’들과 그리고 인간 간의 위계에서 여전히 아래에 존재한다.

 

이 텍스트들 아래로 집계된 로드킬 당한 고라니 등과 같은 동물들의 리스트가 공중에 매달려 있다. 매끄러운 바탕에 적힌 이 리스트들은 동시에 집계되지 않은 더 많은 죽음들을 환기시킨다. 반복적으로 드러낸 이 죽음들의 기록은 원 형태를 띠고있는 드로잉과 함께 설치되어 있다. 작가는 텍스트와 드로잉의 설치로 로드킬을 당한 동물의 사체를 마주한 경험과 로드킬을 할 뻔했던 순간 얼어붙고 멀어버린 동물의 눈을 마주한 경험의 감각을 드러낸다.3)

 

전시가 이 경험 혹은 충격으로부터 촉발된 감각들을 전시 공간에서 재현하는 과정이라면 이는 핼 포스터가 외상적 리얼리즘의 견지에서 워홀의 재난 이미지들을 분석한 ‘실재의 귀환’을 연상시킨다.4)  포스터는 자크 라깡의 “외상적인 것은 실재와의 어긋난 만남”이라는 정의를 통해 “실재는 재현될 수가 없고 반복될 수만 있으며, 실은 반드시 반복되고야 만다”고 설명한다. 이 반복은 “실재를 가리는 구실을 하고 이런 필요 자체는 실재를 가리키기도 하는데, 이 지점에서 실재는 반복의 스크린을 파열시킨다.” 이를 통해 포스터는 반복된 이미지로 죽음에 대한 충격을 가리고 실재를 드러내는 구멍을(롤랑 바르트의 푼크툼punctum 이자 라캉이 아리스토텔레스를 빌어 투셰 tuché라 일컫는 구멍)워홀의 이미지 안에서 뜯겨지거나 가려진 부분들로 설명한다.

그 실험과정에 대한 이야기들은 이 드로잉을 통해서 가능할 것이다. 작가는 개인적 경험을 전시에서 설명하지 않지만 드로잉은 쉽게 밤의 어떤 빛, 혹은 어둠, 혹은 구멍, 혹은 눈 그리고 다시 시선을 연상시킨다. 작가는 동물들의 죽음을 이 시선의 감각으로부터 이야기할 것을 시도한다. 이 빛은 헤드라이트에 멀어버린 동물의 눈에 반사된 빛이자 우리를 보는 시선처럼 읽힌다. 그날 이 눈을 바라본 작가는 역으로 다시 바라봄을 당했다. 정신분석학에서 말하는 응시gaze의 경험이다. 눈이 먼 동물의 눈에서 ‘바라보기만 하던 것에서 보여짐을 알게 되는’ 이 갑작스러운 경험이 전시장에서 공유된다. 이 보임을 느끼게 했던 시선이 드로잉과 설치작업을 통해 관객을 바라본다. 라캉은 “응시는 자신을 바라본다”고 설명한다.5)  전시는 이 동물들 그리고 이 죽음들을 바라보는 작가의 태도가 응시로부터 나옴을 설명한다.  그리고 만약 가능하다면 관객도 죽은/죽는 ‘그것’들을 응시를 통해 다르게 보기를 제안한다.6)

그렇다면 전시는 이 죽음을 바라보는 관객들을 어디로 이끄는가. 이름을 부여 받은 강력한 ‘그’ 동물들이 최후 심판의 날 도살되는 내용의 텍스트들은 관객을 밖으로 이끈다. 그리고 여기서 ‘그’와 ‘그것’ 그리고 인간의 위계가 뒤섞인다.  전시장 외부의 설치 작품은 ‘베헤모스’와 ‘레비아탄’이 도살되어 식탁에 올라간 최후의 날 만찬을 그린 삽화를 연상시킨다. 관객이 천장에 매달린 동물 가면을 쓰는 순간 만찬에 ‘그’ 동물들을 먹는 의인 the righteous의 형상을 띄게 된다. 조르조 아감벤은 이 삽화와 함께 구약성서의 이사야서 11장에 묘사된 ‘동물의 본성들이 변형되고 맹수와 인간이 함께 노는 평화의 왕국’에 대해 설명한다.  작가는 최후의 날이 오면 인간과 동물의 관계가 새로운 형태로 화해하고 공존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상상 속 장면을 전시장에 설치한다.

이 설치 작업은 이 글의 제목으로 돌아가게 해준다. 그래서 이 죽음들이 어쨌다는 것인가. 작가는 동물의 죽음을 추모하고 환경파괴와 인간의 개발을 비판하고자 하는 것일까. 사실 이에 대한 비판과 이해는 이 죽음을 둘러싼 우리의 이식과 상황의 변형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없다.7) 이미 우리는 이 죽음을 둘러싼 외부적 요인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작품은 가면을 쓰고 있는 작가 혹은 관객에게 이 죽음들에 대한 시선을 내부로 돌리도록 제안한다.

그리고 거기에는 마치 로드킬의 위험에 있는 동물들의 삶과 언제든 동일시 될 수 있는, 이동하고 생존을 위협받는 자신의 모습이 있다.  동시에 이들의 죽음에 대해 알고 있는 냉소적 태도를 여전히 유지하는 자신의 모습도 있다.  이 글의 제목은 그 태도의 한 가운데 있는지도 모른다.  이제 가면 안에서 우리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향해야 한다. 우리는 모르는 것이 아니라 알고서도 행한다. 이 전시는 오늘날의 냉소적 주체는 과거와 달리 이데올로기적 가면과 사회 현실 사이의 거리를 잘 알고 있다는 슬로터다이크의 주장이 우리의 일상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음을 보여준다.  우리는 가면을 고집하며 가면을 유지할 핑계들을 찾아낸다.8)  마지막 설치 작업에서 인간과 동물이 하나 된 왕국의 모습을 상상하지만 현실로 돌아오면 여전히 우리는 가면을 쓰고 있다.

모든 생명 소중하다. 그리고 로드킬의 위험은 인간이 만든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아주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죽음에 대해서 정말 잘 알고 있는가. 전시는 죽음과 그 시선들 사이에서 다시 질문한다. 또다시 질끈 눈을 감고 시체를 넘어 갈 것인가.

 

필자소개

채영은 학부에서 전자물리학과 미술경영을, 대학원에서 미술이론을 전공했다.  2015년부터 현재까지 전주에서 운영 중인 공간시은의 대안성과 지속성을 모색 중에 있다. 공간의 정원을 가꾸고 까페를 함께 운영하면서, 시각 예술과 관련된 글을 쓰고 교육 프로그램도 운영 중이다.

1) 이번 전시를 장소 특정적 미술로 오해하는 일은 없어야겠다. 오랫동안 방치되어 있던 옛 여관은 환경을 파괴하는 개발이 연상되어 로드킬 현상과 연결될 수 있다. 하지만 작가는 장소를 담론과 서사의 영역으로 확장시켰다기보다는 작가의 경험과 감각을 효과적으로 드러낼 수 있도록 작업에 끌어들인 것에 불과하다.  오히려 전시에 집중될 수 있게 공간의 많은 부분들이 보수되거나 가려지기도 했다.

2) 구약성서 욥기 40장에 등장하는 괴수로 묘사된 동물들이다. 신에 의해 이름이 부여된 동물들은 강력한 악의 세력으로 묘사되지만 신의 통제 안에 있다. 이들의 최후가 묘사된 13세기 히브리어 성서의 삽화를 언급하는 조르조 아감벤의 [The Open]의 첫 장은 이번 전시의 중요한 모티브다.  Giorgio Agamben, “Theriomorthous”, The Open: Man and Animal, Stanford University Press, 2004, p.1-3

3) 죽은 동물에 대한 경험을 보다 직접적으로 드러냈던 것은 소보람의 이전 전시 〈데자뷰 Déjà vu_밤의 조각들〉에서다.

4) 핼 포스터는 실재의 귀환에서 앤디워홀의 〈불타고 있는 흰색 차 III〉,(1963)와 같은 죽음의 재난에 관한 이미지들에게서 작동하는 반복들을 분석한다.  소보람의 작업과 유사점을 찾아보려는 것은 이 작업을 미술사 내에서 찾거나 위치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이 리스트의 반복을 통해 작가의 의도가 전시 내에서 제대로 작동할지 여부를 보기 위해서다. 핼 포스터,  [실재의 귀환], 이영욱, 조주연, 최연희 옮김, 경성대학교 출판부, 2003, p.212-219.

5) 자크 라캉, [라캉의 욕망이론], 이미선 옮김, 문예 출판사, 1999, p.209.

6) 라캉은 응시를 주체가 상상계에서 상징계로 들어서는 것으로 설명한다. “응시는 실재라고 믿었던 대상이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키지 못함을 깨닫고 다시 욕망의 회로 속으로 빠져들게 하는 동인이다. 기표를 작동시켜 주체를 반복충동으로 몰아넣은 중심의 결여, 즉 실재계에 난 구멍이다.” 권택영, [해설:라캉의 욕망이론], 앞의 책, p.32

7) 자크 랑시에르, [미학 안의 불편함], 주병일 역, 인간사랑 p.83

8) 슬라보예 지젝,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 이수련 옮김, 새물결, 2013, pp.62-64.

지젝에 따르면 우리는 이데올로기라는 계몽된 허위의식의 역설을, 그 거짓을 아주 잘 알고있다.  그 뒤에 숨겨진 특정 이익에 대해서 잘 알고 있으며 계산에 넣고있다.  그리고 그것을 포기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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