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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적인 것은 폭력의 구조 안에서 어떻게 움직이는가

 

                                                                                                                                                               

                                                                                                                                                                 양효실

  

 

소보람 작가의 2024년 개인전은 2017년의 개인전 제목 “그 vs 그것”을 그대로 사용했다. 이 둘 사이에 소보람은 “그룹 프로젝트”를 진행해왔고, 작가의 홈페이지에 들어가서 보니 소보람은 개인전이란 이름 대신에 “개인 프로젝트”란 이름을 사용한다. 개인전이란 관습에 자신의 작업이 어울리지 않는다는 판단에 근거한 것 같고,1) 연구나 계획으로 번역될 프로젝트, 교육학에서는 “학습자가 스스로 자기 활동을 선택·계획하고 방향을 설정해 가는, 문제해결의 학습”을 뜻하는 프로젝트, 라틴어 어원 ‘projectum’에 따르면 pro(before)-ject(to do), 즉 ‘행동-이전’을 뜻하는 프로젝트는 영어로 넘어와서는 글자 그대로는 “팀, 조직, 사회에서 변화를 가동시키려는 목적을 갖는 일시적인 노력”으로 정의되는 것 같고, 그러므로 소보람 작가의 프로젝트는 그녀가 유사 연구자로서 우선 움직인다는 것을 드러낸다고 읽힌다. 소보람 작가의 작업의 “동인(motor)”이 무엇인지를 어렴풋이 알고 있는 나는 사실 ‘결론’을 상정하고 이 글을 시작하고 있는 셈인데, 미술을 하는 사람이 아닌 단발성 프로젝트를 계속 이어 붙이며 반복과 차이의 ‘쾌락’을 영위하는 미술계의 작가이자 프로젝트의 연구자-학습자인 소보람의 작업을 나는 바르트를 인용하자면 “텍스트”―짜여진 것으로서건 쓰여진 것으로서건―로 대우하고, 작가를 필사자―원본의 주인-저자보다는 인용한 것을 모으고 확장하고 겹쳐놓는 필사자로―로 대우하는 게 좋을 것 같다. 어쨌든 소보람의 프로젝트는 사회학적 리서치, 실험실 연구원의 스탠스에 기반한 것이지만, 그것들이 종국에 꾀하는 것은 차용된 다른 분과의 구조들을 압도하는 시적인 것, 미적인 것의 힘에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이 또한 내 글이 중간에 방향을 상실하게 된다고 해도, 마지막에 도달해 있어야 할 ‘결론’이다.

 

2017년의 “개인 프로젝트” 《그 vs 그것》은 2016년 작가가 마주친 고라니의 죽음에서 비롯된 것이다. 누군가가 치고 간 고라니를 또 치는 사고(accident)―엄밀히는 누군가가 죽인/유기한 고라니를 책임지는 프로젝트를 시작하게 되는 사건(event)이었던―를 자행/당하고 소보람은 “차 안에서 얼어붙은 채로 바깥의 타자들―죽은 고라니와 그 옆의 살아 있는 새끼 고라니―와 몇 초간 혹은 영원히 대치했다/대치한다.” 죽은 고라니는 소보람과 얼추 크기가 같았고, 그러므로 ‘그것(it)’-고라니는 살아서 ‘내’가 목격하는 ‘나’의 죽음에 대한 선제적 대응의 ‘제물’ 같은 것으로 번역될 것이었다(나는 다음 글에서 “그 옆의 살아있는 새끼 고라니”에 대해 이야기할 것이다. 소보람과 눈길을 주고받은 작고 어린 동물이 소보람을 붙들고 무슨 사건-폭풍을 일으키는 ‘나비’가 되어 있을 지에 대해서는). 소보람은 그날 이후 죽은 고라니와 산 고라니가 꿈으로건 일상으로건 아무 때나 찾아와 자기들을 고집했는지, 그것들이 어떤 ‘요구’를 해댔는지, 지금도 현실과 환상이 뒤섞인 그 혼몽한 말걸기(address), 타자가 자아를 놔주지 않고 요구하는 말걸기, 그러므로 어떤 언어로도 번역불가능한 요구를 탑재한 말걸기를 우선은 로드킬에 대한 기존 연구를 빌려 떠안아야 했다고 했다. “그것이 자신에게 뭔가 말을 하고 있다”는 것은 분명했지만, 그 말이 어떤 말인지는 알려지지 않았으므로, 먼저 ‘인간화된 프레임’에 편승해서 사이-틈을 벌려야했던 것이다. 어두운 밤 살아있는 고라니와 눈을 교환했던 내가 이번에 처음 찾아본 바로는 2007년 한국도로공사 자료에 의하면 “우리나라 로드킬의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동물인 사슴과 동물 고라니”는 로드킬 정보 시스템에 의하면 “2019년과 2020년 로드킬로 죽은 동물 3만6천마리 중 만6천 마리”를 차지한다. 통계와 수치는 추상적이고 객관적인 정보에 불과하고, 유일무이한 ‘나’의 고라니는 이곳에 있으면서 있지 않다. 소보람이 2016년에 읽은 김백준 등이 지은 『한국 고라니』(국립생태원, 2016)는 물을 좋아하는 고라니(water deer)를 근거리에서 연구한 생태학 연구서로, 마지막 장에서야 ‘로드킬’이라는 고라니가 당면한 근대적 비극을 다룬다. 너무 흔해서, 너무 밉보여서 관심-연구가 부족했던 고라니에 대한 마침 “최초의 생태 전문서”가 나왔고 마침 소보람은 자신이 겪고 계속 붙들린 타자와의 만남의 요구에 반응해서 이 책을 참조하였고 2017년 전주역 근처 구(舊) 명산 여관에서 《그 vs 그것》을 ‘전시’했다. 나는 그 전시에 초대되었던 관객 중 한 사람인데, 흐릿한 기억, 그러므로 현실과 환상이 뒤섞인 그 전시장 음습하고 어둑한 ‘여관방’에서 고라니의 울음소리를 들었던 것 같고,2) 한 해에 로드킬당하는 고라니의 숫자에 대한 소보람의 작가적 배치 형식을 보았던 것 같다.   

 

전시 제목을 두고 소보람은 “인칭대명사인 ‘그’와 지시대명사 ‘그것’ 사이에서, 죽은 동물의 몸을 어떻게 지칭할 것인가?를 두고 갈등하는 자신의 마음”을 기록하고 싶었다고 말한다. 자신이 거울동일시한 죽은 타자를 부를 온당한 이름을 결정하지 못한 자신의 아포리아를 저런 상태로 가시화한 것이다. 나는 수컷에게도 뿔이 없어서 암수 구분이 안 되는 고라니, 그러나 옆에 새끼가 있었기에 암컷일 가능성이 농후한 고라니를 왜 남성인칭 대명사 그(he)로 부르려는 욕망을 갖게 되었느냐고 물었고 이에 대해 “영어로 표기할 때는 he/she를 중복 표기했다, 보통 서양 회화에서 사냥의 대상은 뿔이 달린 수컷 사슴이다, 오비디우스의 『변신』에 나오는 사냥꾼과 아르테미스 신화가 ‘사냥꾼의 기하학‘의 모티브였다, 아르테미스가 남성 사냥꾼을 사슴으로 만드는 부분을 갖고왔다”는 긴 문자가 왔다.3) 소보람은 자신이 목격한 로드킬당한 사슴-고라니가 출현할 주관적 ‘무대’를 그리스-로마 신화에서 빌려왔다. 이는 소보람의 오랜 프랑스에서의 유학 생활과 이후 레지던스로 방문한 네델란드 및 스위스에서의 연구에 기반한 것으로, 무차별적으로 들어서고 있는 도로와 한국에서의 기형적인 고라니의 생존(혹은 고라니에게 자행되는 폭력)에 대한 사회학적-생태학적 연구를 상상력에 기반한 신화로 뒤덮는, 무차별적 폭력으로서의 근대적 폭력에 신의 형벌이라는 신화적 폭력을 덧입힘으로써 총체화하는 객관적 구조를 유일무이한 이야기로 대체하려는 전략이다. 신화에서 ‘그(that)’ 고라니-사슴은 악타이온이었고, 그러므로 사슴으로 변하고 죽어가는 악타이온은 인간-동물이고 이미 항상 둘이다. 소보람은 자신의 고라니, 자신이기도 한 고라니의 죽음을 금기를 어긴 인간의 죽음으로 번역하는 프로젝트를 2017년에, 그리고 2024년에 두 번 진행함으로써, 동물을 상대로 한 근대적 비극의 일종의 ‘영구적 상태’를 알리고, 그런 ‘내부’로서의 폭력의 장-구조에 예술은 어떻게 개입해서 틈을 만들고 유예된 시간을 벌 수 있는지를 증명하려고 한다. 그것밖에 예술이 할 수 있는 게 없다, 혹은 그게 예술이 해내는 위반의 전부다.

 

2024년 전시장 왼쪽 벽에 설치되어 있던 것은 소보람이 종이 신문과 온라인 신문에서 직접 찾아낸 어떤 근대적 “구조”에 대한 것들이었다. 2016년 전주 성매매 집결지 선미촌 프로젝트를 시작하면서 한국에서 성매매 여성이 어떻게 재현되어 왔는지를 조사할 목적으로 백년치 신문을 놓고 “무식하게” 뒤지다가 소보람은 예기치 않게 재현의 정보-내용이 아닌 재현의 구조를 대면하게 된다. 똑바로 뜬 눈이 아닌 비스듬하게 가로지르는 눈이 발견하는 것이 있다. 내부에 존재하는 것을 찾다가 내부의 비가시적 전제 혹은 내부의 이데올로기를 발견한 것이다. 소보람은 자신이 발견한 구조의 반복성, 규칙을 전시장에 주르륵 나열했다.

취재에 기반한, 소외당한 이웃이나 비참한 상태로 살아가다 죽어가는 동물들이 신문의 기사로 보인다. 그리고 기사 아래 광고에는 그런 이웃을 억압하는, 그런 동물에 대한 잔인한 살육을 정당화하는 상품 광고가 실려 있다. 가령 1983년 어느날 경향신문은 “반달곰을 살려라, 비상 3일”이란 제목의 우리에 갇힌 반달곰의 처절한 최후를 찍은 사진 바로 아래에 거대한 곰이 포효하는 이미지를 사용한 대웅제약 광고를 게재했다. 가령 1984년 어느날 조선일보 기사는 “물난리에 잊혀진 이웃들”에 대한 기사를 싣고, 광고란에는 한가위 송편을 빚고 있는 행복한 가족의 이미지와 추석에 포식으로 위장에 문제가 있을 수 있으니 아진탈 소화제를 먹으라는 광고가 실려 있다. 가령 1992년 한겨레 신문은 오스트리아에서 수입한, 우리에 갇힌 뿔 달린 숫사슴 사진과 피로에는 우루사를 먹으라는 대중제약의 우루사 광고를 한 면에 동시에 게재했다. 소보람은 좌와 우를 가리지 않고 모든 신문의 사회면에서 자행되는, “무의식적”, 기계적, 자본화된 폭력의 대비만 남겨놓고 그날 신문의 다른 부분은 흰 공백으로 수정함으로써, 자신이 목격한/발견한 일상적 폭력의 기괴함을 증폭시킨다. 나는 너무 소스라치게 놀라서, 1980년대 독재정권 치하에서 자행된 “다른” 폭력을 대면하고 말을 잊은 채 작가에게 물었다. 기자가 이걸 알았을까요? 백년치 신문을 모두 읽고, 심지어 전시장에 너무 끔찍해서 설치하지 않은 “쿠데타의 상징으로서의 탱크와 웨딩드레스를 입은 행복한 신부들”이 나오는 광고에 대해 이야기해주던 소보람은 그들이 “알고” 실었을 것이라고 미동도 없이 말했다. 네델란드에서 이 프로젝트의 결과를 발표했을 때 “비약”이라고 대꾸한 관객이 있었다고 했다. 그/그녀의 방어기제가 내게서도 나오려고 했다. 알고도 공모했는가와 모르기에 반복했는가―이 둘은 분노와 수치심/죄의식이라는 우리의 근대적 ‘감정’의 차이, 혹은 그 유사성을 표지한다―를 놓고, 직접 연구-조사한 소보람은 결론을 내렸고 나는 그렇게 되지 않았고, 울음으로 녹여내야 할 덩어리가 느껴졌지만, 눈물은 억제되기만 할 뿐 구멍을 통과하지 못했다. 어떤 슬픔들이 그 울지 못한 감정을 토해낼 구실로 찾아왔지만 늘 부적절했다. 거기엔 공모했던, 무지했던 나도 가담해 있기에, 나로부터 그 덩어리를 밀어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삶이 잡지 이외의 아무 것도 아니고 진실한 것은 한 개비의 담배이며 현실세계는 MTV 위에 펼쳐지는 끔찍하도록 매혹적인 무차별적인 다큐멘터리가 될 정도로 현실 자체가 스펙타클에 의해 전도되고 말았다”는, 결국 자살한 기 드보르의 1960년대 문장이 다시 떠올랐을 뿐이었다.

 

                                                                                                   

그리고 소보람은 자신이 발견한 이 냉혹한 냉담의 구조 “위에” 자신이 사전에서 발견한 언어의 모호성, 다중성, 미결정성을 첨가한다. 가령 대웅제약에 필요한 쓸개를 위해 일생 뜬장에서 지내다 죽음을 맞이하는 곰의 실상과 쓸개 약 광고가 동시에 나오는 지면 위에 표준국어대사전에서 찾은 ‘약’이란 단어의 1번째, 7번째, 9번째 의미를 첨가한다. 첫 번째 ‘약’은 “식물의 자극적 성분”이나 “몹시 비위가 상할 때의 감정”이고, 7번째 약(藥)은 우리가 아는 약, 또 해로운 동식물을 없애는 데 사용되는 물질, 심지어 화약이고, 9번째 약(弱)은 “힘이 없는”이란 뜻을 갖는다. 약은 식물 자체가 갖는 성분이거나 인간의 감정이거나 병이나 상처를 예방하고 해로운 동식물을 없애는 물질, 나아가 화약이고, 매우 힘이 없는 것이다. 먹고 낫는 수단-물질로서의 약은 기표 약의 스펙트럼 중 극히 일부분에 불과하다. 가장 널리 사용되는 기표-개념 약에 들러붙은 이 부차적이고 사소한 정의들이 재현의 체제를 닫힌 구조로 만드는 데 잔여물로 틈으로 움직인다. 글자그대로 우리에 갇힌 동물들에 대한 고발적 기사와 은유적으로 우리에 갇힌 울코트를 입은 한 무리의 남자들이 이미지인 울코트 한정세일 광고가 병치된 신문 기사 위에 배치된 표준국어대사전의 단어는 “우리”이다. “짐승을 가두어 기르는 곳”인 우리와 “여러 사람을 가리키는 일인칭 대명사” 우리가 병치된다. 구조로서의 폭력/우리 안에서 우리는 누구인가? 혹은 우리 안에서만 가능할 우리는 어떻게 출현하는가? 소보람은 이미 우리가 알고 있는 폭력, 그러나 그 폭력을 빼면 작동할 수 없는 구조, 그러므로 우리가 이미 갇혀 있는 구조를 중립적으로 기술하고, 그 위에 그럼에도 어떤 구조를 진동처럼 흔들, 여진처럼 감지될, 흔적처럼 간과할, 비의처럼 해독불가능한 가능성을 얹는다. 동음이의어에 하나의 청각적/시각적 기표에 이미 항상 약하고 불가능한 타자들의 잔여가 묻어 있음을, 그리고 그런 여지나 가능성을 붙들고 자신은 계속 프로젝트를 하고 있다고 거의 안 들리고 안 보이게 보여준다. 그래서 이런 메일이 들어왔다. “네, 이 부분이 제가 전하고자 하는 부분이었고, 하나의 단어를 여러 의미들로 여러 번 곱씹는 과정에서 배치된 이미지들 사이의 힘의 역학을 시적 심상으로 제시할 수 있기를 바랬습니다.”

 

이 글은 소보람이 이야기한 “시적 심상”이라는 단어에서 끝이 난다. 소보람이 말하는 “시(詩)”, 닳고 닳은 재현 이미지들 “사이”에서 작동하는 힘의 역학을 붙들어매려는 언어적 작용을 번역한 “시적 심상”까지는 온 것 같은 데 그것이 어떤 아름다움이나 매혹을 일으키는 지는 다음 번 글에서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다. 폭력의 구조 안에서도 아름다움은 아름다워서 “우리”를 일으킨다는 것에 대해서는.​​

 

필자소개.

양효실은 태도로서의 페미니즘-퀴어의 (미적) 정치가 육화된 텍스트 읽기에 광적으로 집착한다. 미술 비평이 주업이고 연극, 문학, 공연도 들락거린다. 『불구의 삶, 사랑의 말』, 『권력에 맞선 상상력, 문화운동 연대기』 등을 썼고, 주디스 버틀러의 『윤리적 폭력 비판』 등을 우리말로 옮겼다.

(출처: 세마 코랄)

1) 완성된 글을 보내자 소보람은 이렇게 첨언했다. “건축가 친구가 건축물 하나가 지어지기까지 조정되는 전과정, 나아가 중단, 폐기의 가능성을 갖는 임시적 계획을 프로젝트로 부르는 것에서, 저도 전시보다는 프로젝트라는 말을 사용하게 되었어요.” 기표는 불안정하고, 계속 확장·분기하면서 모호해지고 화려해진다. ‘우리’의 언어는 말걸기(address)의 구조, 이자적 관계 안에서 잠시 고정될 뿐.

2) 내가 고라니 울음으로 기억하는 그 소리를 소보람이 오늘 이렇게 수정해준다. “전시장에서는 동물의 울음소리로 기억되길 바란 그 소리는 당시 작업실에서 잠자던 저를 이른 아침마다 깨우던 소리, 멀리 건설 현장에서 무언가를 신경질적으로 자르는 기계음을 녹음한 것이었어요. 그 소리가 밤마다 소리 없이 사라진 동물들의 울음소리 같다고, 칼날에 실린 비명 같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청자의 기억은 당사자의 증언에 의해 7년 후 수정되고, 더 잔인해지고 더 증폭된다. 나는 아마 그라인더의 소리를 이제 동물의 울음소리로 동시에 듣게 될 것이다. 기억은 무의식을 경유한 ‘깊이’가 아닌 시간들의 레이어이다. 기억은 현재들의 겹이다.

3) 보충하자면 “특히 사슴과 곰을 신성한 동물로 여긴”, 자연의 수호자이자 야생의 여신인 아르테미스는 숲에서 목욕하는 자신을 훔쳐본 사냥꾼 악타이온을 사슴으로 만들어 자신의 사냥개들에 의해 물어뜯기다가 죽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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