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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중에, “아무도 아닌 자의 땅(no-man’s land)”1)에서 경작하기

 

                                                                                                                                                               

                                                                                                                                                                 홍희진

  

 

인간은 동물인가 아닌가. 여타 동물보다 우월한가. 다수성은 개체 수의 많고 적음과 무관하다. 오히려 그것은 지배의 구조를 전제로 한다. 인간이 어떻게 동물로부터 떨어져 나와 특권의 지위를 얻었는지, 그리고 어떻게 더 큰 수의 존재조차 ‘소수’로 전락시킬 수 있었는지를 되묻는 일이 중요하다. 이러한 기이한 ‘당연함’은 어떤 논리와 구조를 통해 가능해졌을까. 다시 말해, 인간이라는 지배적 위치를 해체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견고히 떠받치고 있는 기준, 표준, 상태에 대해 관찰하고 질문해야 한다. 질문할 일이다. 전시장에는 나와 너의 관계, 혹은 나와 그 아니면 그것이라는 연결 (불)가능한 관계 선상에서, 피부들이 널려있다. 식물성 미생물로 만들어진 발효 가죽은 개별적이나 하나로 묶이는 종처럼 우리가 가진 피부와 닮아있다. 가죽, 피부 또는 표피로 부를 수 있는 이 물질은 흐릿하게 투명하여 얇거나 도톰한, 노랗거나 누르스름한 빛깔을 띠고 있다. 작가는 도대체 무엇을 한 것인지 탐색한다. 그리고 역사를 문서로 기록하고 있는 지구상의 존재가 얼마나 될지, 그 기준과 규정, 분류에서 이 물질을 무엇으로 지각할 수 있는지 고찰한다. 명확한 판단을 위해 가져와야 할 정보체계, 다시 말해 인간의 역사가 수천 년의 문자 시대를 지나오며 견고히 세워놓은 가치체계와 기준으로 정리하여 학습해 온 것들이 있다. 작가는 이러한 학습들 가운데 이 물질과 연관 지어 불러올 수 있는 것들이 있는지 고민한다. 새해를 다음 달로 두고 계엄이 선포되고 국민은 길거리로 대통령 탄핵 시위를 나가는 아수라장인 시국에 대학로의 한 전시장에서 펼쳐진 이 예술 행위, 이 실천들은 와중에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이 글은 문화예술생산자 소보람 작가가 7년 전 찻길 동물사고(로드킬)를 당한 동물들을 위한 의식과 같은 개인전 《그 vs 그것》2) 과 동일한 제목으로, 2024년에 열린 개인전을 통해 작가가 가진 질문과 태도, 이에 응하는 작품들에 대하여 다시금 읽어보기 위한 글이다.

 

작가는 인간의 정보와 가치체계 아래 펼쳐지는 예술적 실천이 아닌 보다 큰 범주에서 인간을 본질적으로 다른 존재로 생각하게 하는 기준과 규정, 분류로부터 동식물을 함께 해방하는 태도를 보인다. 인간이 역사적으로 획득해 온, 필연적이라고 말할 수도 있는 위계구조와 그것에 균열을 일으키는 미시적 작동 방식에 대해 연구하고 있다. 이 광범위하고 심화된 연구를 위하여 몇 가지 연구 방법들과 퍼포먼스들을 보여주고 있는데, 첫 번째, 작가는 수년간 미생물을 배양하며 기록·보관하는 방식을 연구한다. 대표적인 작품은 <스물네 개의 너의 몸에서(스마트 스킨 팜)>(2023-2024)과 <스마트 스킨 팜>(2022-2024), <미생물 배양일지>(2022-2024)가 있다. 전시장을 가르며 비스듬히 설치해둔 <스물네 개의 너의 몸에서(스마트 스킨 팜)>은 나무로 만든 네모 틀에서 건조된 식물성 미생물 발효 가죽들이다. 40여 종의 차와 당을 먹고 각기 다르게 생장한 미생물은 모두 다른 무늬와 색을 띈 몸을 형성하고 있다. 건조되어 죽은 것처럼 보이지만 반복적으로 재생하는 몸으로 다른 존재 방식을 가진다. 마치 이 물질은 작가가 2017년 죽은 동물의 몸을 대했을 때 ‘그’라고 불러내어 나라는 존재와 관계 지어야 할지, ‘그것’이라고 부르며 거리를 두어야 할지와 같이 관계 혹은 정체가 완결되지 않은 채 놓여있다. 작가는 이 물질을 ‘식물성 미생물 발효 가죽’이라고 명명하고 배양한다. 이 물질은 고정된 위치 값이 아니라, 관계적 차원에서 형성되는 위상학적 사이에서 존재를 드러낸다. 이 존재의 형태는 틀에 건조하여 보존하는 방식도 있지만, <스마트 스킨 팜>(2022-2024)에서는 미생물 기호를 실험하면서 샘플을 가공하고 보관하기 위해 원형 수조 형태로 둔 모습도 있다. 또 다른 작업으로는 마이로(Miro) 온라인 화이트보드 플랫폼 <미생물 배양일지>(2022-2024)가 있는데 이것은 2022년 7월부터 배양한 미생물의 생장일지를 구성한다. 작가가 조절한 환경 변화 횟수로 세대수를 구분하거나 이동으로 인한 침입, 탈락, 전복의 사건들을 기록하는 장치이다. 보관의 공간과 기록의 장치를 개발하여 식물성 미생물 발효 가죽의 역사로 기준을 드러내는 듯 보이지만 그려진 역사의 다이어그램은 계통과 세대가 역행하거나 단절되어 오히려 해체된 구조를 드러낸다.  

 

두 번째, 작가는 인간이 기억을 위해 수행해 온 기록, 보관, 전시의 방식을 조사하고, 이를 재배치함으로써 그 안에 숨겨진 미시적인 관계를 드러낸다. <기억극장 : 그리스로마신화, 기억극장 : 미생물편 I, II>(202) 작품과 7년 전부터 시작한 신문 자료 수집 작업인 <두 번째 전시 : 피로 쓴 우리 역사, 전설의 게임으로 비상!>(2017-2024) 작품이 이에 해당한다. <기억극장 : 그리스로마신화, 기억극장 : 미생물편 I, II> 작품은 는 종이에 콜라주와 드로잉으로 구성된 작품이다. 이 작업은 16세기 이탈리아 철학자 길리오 카밀로의 ‘기억극장’에서 영감을 받았으며, 극장 형태로 펼쳐진 물리적 공간에 기억과 학습을 위한 신화적 상징 체계와 이름들을 배치한다. 그리고 그 이름들이 19세기 후반 시작된 미생물 연구의 학명 체계에도 차용된 바 있음을 드러낸다. 그뿐만 아니라 작가는 동물과 연관된 그리스로마신화의 각 신들과 미생물 학명을 병렬 배치한다. 그 아래에는, 달, 수성, 금성, 태양, 화성, 목성, 토성으로 각각 묶어내어 이를 17세기 조선에서 풍수사들이 사용했던 나경(羅經)과 연결시킨다. 나경은 방위와 길흉화복을 점치는 도구로, 전통적 우주관과 상징체계의 일부였다. 그렇다면 연대기적으로 20세기 이후 한국은 어떤 가치체계를 따르고 있는가. 이러한 질문은 신문 아카이브 작업<두 번째 전시 : 피로 쓴 우리 역사, 전설의 게임으로 비상!>(2017-현재)를 통해 살펴볼 수 있다. 작가는 동물 이미지가 실린 기사를 검색한 뒤, 종이 신문이나 디지털 신문기사에서 같은 지면에 놓인 광고 이미지와의 관계를 분석한다. 특히 인간의 더 나은 삶을 위한 광고 이미지와 동물 관련 기사 이미지 사이에 어떤 시각적 연관이 있는지를 타진한다. 작가는 원래의 화면 배치를 그대로 남겨둔 채 다른 기사들은 하얗게 지워 광고와 기사 이미지 사이에 형성되는 기이한 병치를 강조하고 이를 통해 동물이라는 존재를 재현하고 대상화하는 방식을 성찰하도록 유도한다. 그리고 작가가 수집 광고 이미지에서 선별한 여섯 개의 단어(우리, 피로, 약, 비상, 전시, 게임)는 사전적 의미를 그대로 전시장 벽에 드러내면서 인간 초점의 불편한 의미들을 고스란히 느끼게 한다. 이렇듯 편집을 통해 이미지 관계를 부각하거나, 선별하고 나열하여 미시적인 구조를 가시화하는 작가의 배치 능력은 주목할 만 하다.

 

세 번째, 작가는 인간이 발명한 기억술 중 이름을 부여하는 행위를 차용하고, 항목별 관계로 재배치한 메타 사전을 제작한다. <균류식물혼합동물사전 I, II, 균류식물혼합동물목록>(2024) 작품은 식물성 미생물이 배양할 때 먹은 차(茶)종과 배양 환경에 따라 모양과 색깔이 달라지는 연구 성과로 시작한다. 각기 다른 모양과 색깔에 동물과 광물을 각각 연결 짓는데 이 방식은 알파벳이나 가나다순의 현대 사전과는 다르며 동물학, 식물학, 광물학 등등의 항목별로 정리해 둔 최초의 박물지 방식과 닮아있다. 인간이 인간과 동물을 구분하는데 견고한 규정과 기준이 되어준 사전이라는 형식을 차용하여, ‘균류 : 색깔 : 동물 : 식물 : 광물’의 등식이 나열된 메타 사전을 제작한다. 이를 통해 기존의 규정과 분류체계를 전복하고 재구성한다. 예를 들어, ‘로즈마리 : 좀사마귀의 머리 : 활짝 핀 목화열매 : 방해석’은 ‘캐모마일 : 굴뚝날도래의 날이자,  ’연잎개 : 팥 꼬투리 : 중정석’이자, ‘연자방 : 장흙노린대의 몸통 : 멀꿀 꽃 : 핑크 백운석  : 알락그늘나비 날개 윗면 바탕 : 비파나무 꽃 봉오리 : 톰소나이트‘ 이자, 무엇이자, 무엇이자, 무엇이 되는 것이다. 작가는 개별 물질을 계보가 아닌 관계로 이해한 세계관을 보여주고 있다.

 

마지막으로 작가가 천착해 있는 주요 주제들인 동물성과 인간성의 경계와 교차에 대한 관심은 다양한 퍼포먼스 형태들로도 나타나는데,

<끝나지 않은 이야기>(2020-2024), <나의 사슴에게>(2022, 2024), <몸을 교환해 드립니다.(스마트 스킨 팜)>(2023-2024) 작품들이 그러하다. <끝나지 않은 이야기>는 작가가 네덜란드 마스트리히트에 체류하며 기획한 동물의 죽음을 기리는 거리 행진으로 코로나로 실제 거리에서 실행되지는 못했지만, 이번 전시에서 그 행진을 위해 깃발용으로 만든 종이에 꼴라쥬 이미지들을 구성한다. 이미지 안에서 동물과 인간의 몸은 조각나 있다가도 다시 부착되어, 다원적이고 유동적인 형태를 이룬다. 이 몸들은 동물과 인간의 경계를 넘나들며, 간단한 접기와 스트레칭만으로도 형태가 변주되는 순간을 포착하고 있다. 겹쳐진 동작들은 마치 한 몸이 되었다가 다시 흩어지는 과정을 보여주듯, 변용적 움직임을 취한다. 그 장면은, 작가가 영감을 얻고 있는 ‘동물과 인간의 위상이 교차하는 세계의 마지막 날’을 연상케 한다.3) 그리고 작가는 <나의 사슴에게>라는 단채널 영상작품에서 차분하고 단단한 어조로 한반도에 고립된 사슴에게 영상 편지 형태와 같은 자전적 글쓰기를 펼친다. 이 편지는 사슴 자신도 모를 물사슴 학명(Chinese water deer)과 사슴에게는 대타자이자 발신처인 ‘소보람’4) 이라는 자신을 소개하면서 시작한다. 국제 멸종위기종인 물사슴의 대만에서 중국을 거쳐 영국, 프랑스까지의 이동 경로를 추적하고 사슴사냥과 그 사냥으로 거래된 사슴의 몸을 조사한다. 작가의 표현에 따른 ‘교환/거래되는 몸’인 사슴은 세계 지도 위도와 경도 위에서 동물의 삶이 처한 위험의 정도에 따라, 취약에서 멸절까지 일곱 색상의 단계로 구분하고, 그 색상으로 지도를 표현한다. 알려지지 못하고 묻힌 죽음들을 우리가 사는 세계에 등장시킨 것이다. <몸을 교환해 드립니다.>는 작년 <스마트 스킨 팜>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진행된 작업이다. 관객이 지문과 개인정보를 입력하고, 미생물의 먹이로 차(茶)를 선택하면, 작가는 이에 맞춰 1년 이상 미생물 가죽을 배양한 뒤, 해당 미생물에 학명과 관객의 닉네임을 결합해 이름을 붙이고, 그 결과물을 관객에게 전달한다. 이 프로젝트에 참여한 필자는 일 년 만에 미생물 가죽을 받았는데 나(내 피부)와 상관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내 일부의 신체 조직을 마치 작가에게 위탁했다가 받은 미묘함을 느낀다. 작가는 물사슴의 죽음을, 실제 지리 정보와 연결함으로써, 사라진 존재에 구체적인 좌표를 부여한다. 이러한 전략은, 서로 무관해 보이는 존재와 사건들 사이를 다시 생각하게 만드는 묘한 힘을 발휘한다. 작가의 이러한 제시는 거시적 시점에서, 인간을 포함한 우주의 모든 물질이 맺고 있는 불가분의 연결 관계에 대해 사유하도록 이끈다.

 

지금까지 서술한 작가의 연구 방법인 식물성 미생물 배양, 기록, 보관, 전시, 배치 등은 뮤지올로지(museology)에서 진행하는 행위들과 닮아있다. 이러한 행위들은 죽음이라는 유한성을 지닌 인간이, 자신의 존재를 지속시키기 위해 선택해온 학습 장치이자 교육 체계로서 기능해왔다. 작가는 미생물 배양과 기록, 보관, 전시라는 방식으로, 인간이 만들어온 기억의 형식을 다시 배운다. 그리고 스스로를 ‘그물 속의 한 올’5)로 자리매김하며, 다음 세대를 위한 예술적 저항을 이어간다. 이 작품들이 존립하기 위해서, 수년간의 식물성 미생물 배양 과정에서 요구되는 작가의 숱한 인내와 집요한 관찰력이 필수적이었음을 짐작한다. 이는 예술가만이 감당할 수 있는 고유한 기쁨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며, 경작의 기쁨, 배양의 과정을 돌보는 마음, 육아의 보람과도 닮아 있다. 그리고 작가는 ‘아무도 아닌 자의 땅(생성)에서 식물성 미생물을 배양하기 위해 만든 수조 안이 점차 지구의 조건들과 닮아가는 것을 발견하고 있는 와중에, 산소, 이산화탄소, 메탄의 작은 기록들이 남겨지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필자는 그 미세한 흔적들이, 언젠가 나비효과처럼 폭발적인 반향을 일으키기를 조심스레 꿈꿔본다.

 

필자소개.

홍희진은 전시를 구성하는 요소들과 전시가 작동하는 시간-공간적 조건에 관심을 두고 있는 전시연구자이자 독립큐레이터다. 초연결 네트워크와 감각, 몸을 주제로 한 작품을 마주할 때, 전시를 기획하거나 글쓰기를 통해 그 경험을 매개한다.

1) ‘아무도 아닌 자의 땅’은 다음 문장에서 발췌한 용어이다. “생성은 둘-사이이며, 경계선 또는 도주선, 추락선, 이 둘의 수직선이다. 생성이 하나의 블록(선-블록)이라면, 그것은 생성이 근방역과 식별 불가능성의 지대를, 아무도 아닌 자의 땅을 구성하며, 떨어져 있거나 인접한 두 점을 탈취하며 한 점을 다른 점의 근방으로 데려가는 위치를 정할 수 없는 관계를 구성하기 때문이다.”, 질 들뢰즈, 펠릭스 가타리, 『천개의 고원』, 김재인 옮김, 새물결, 2001, 555쪽.

2) <그 vs 그것>(2017) 개인전을 위한 작가의 메모에는 두 장의 이미지가 있다. 하나는 <13세기 히브리 경전에 그려진 마지막 날에 대한 묘사>(암브로시아 도서관 소장, 이탈리아), 다른 것은 제라드 그랑빌(Gérard Grandville)이 그린 삽화인쇄물 <손님을 기다리기>(1830, 프랑스)이다. 두 이미지의 공통점은 머리는 동물들이고 몸은 인간의 형태로 만찬을 즐기고 있다. 작가는 그때도 지금도 인간성과 동물성에 대한 질문, 동물과 인간의 삶이 교차하는 지점에 천착해 있다.

3) 작가가 많은 영감을 받고 있는 조지오 아감벤의 저서 『The open』은 본질적으로 동물과 전혀 다른 일종의 존재로 생각되어 온 방식을 연구하기 위해 고대 그리스, 기독교, 유대교 문헌과 20세기 사상가들이 인간과 동물을 구별하기 위해 펼친 논리적 전제와 방식을 알아보고, 이 구별로 인해 다른 학문(철학, 법학, 인류학 등)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조사한다. 책 속에서는 13세기 히브리 경전에 그려진 마지막 날에 대한 그림을 언급하는데 동물의 몸을 한 인간(인간의 몸을 한 동물)들이 모여 있고 탁자 위에는 고기가 있다. 이 기이한 존재들과 탁자 위 고기와의 관계에 질문하며 세상의 마지막 날 인간과 비인간의 관계가 전복된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떤 형태일까? 작가는 이 지점에 대해 상상하는 중이다.

4) “나의 이름은 ‘바라보다, 보다’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 <나의 사슴에게>에서 작가가 물사슴에게 자신을 소개하는 문구이다. 소보람 작가의 이름 속에 본다는 태도가 담겨있다는 것은 시각예술가 이름으로서 예술가의 본분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5) ‘그물 속의 한 올’은 다음의 문장에서 발췌한 용어이다. “우리는 모두 알고 있다. 한 가족이 혈연으로 이어지듯 삼라만상이 모두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지구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은 지구의 딸과 아들들에게도 그대로 닥친다. 인간들이 생명의 그물을 짜는 것이 아니다. 인간이란 단지 그 그물 속의 한 올일 뿐. 그 그물에 가하는 모든 일은 스스로에게 향한 것이니. -테드 페리”, 프리초프 카프라, 『생명의 그물』, 김용정·김동광 옮김, 범양사출판사, 1998,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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